속도의 안내자 - 이정연 장편소설
제10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이정연 장편소설 ‘속도의 안내자’ 출간
연합뉴스와 수림문화재단이 공동 제정한 수림문학상의 제10회 수상작인 ‘속도의 안내자’가 단행본으로 출간돼 독자와 만난다.
`속도의 안내자`는 주말에 경마장 도핑검사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주인공 채윤이 많은 보수를 받는 대신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 하는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소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오랜 염원인 불로장생과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21세기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소설에서 불로장생과 그 비밀을 푸는 열쇠인 불로초는 오늘날 급격히 발전한 바이오 기술에 걸맞게 생명 연장 연구라는 의·과학적 설정으로 등장한다. 항노화 연구를 다루는 첨단 바이오 테크놀로지와 거대 자본이 나오고 인간의 욕망이 교묘한 사슬로 얽히면서 현실성과 흥미를 더한다.
▲ 거대 자본이 주도하는 ‘생명 프로젝트’의 실체와 마주하다
채윤은 대학 졸업 후 서른을 앞두고 있는데도 전공을 이어가 공부를 더 할지, 아예 다른 길로 돌아설지 미래가 희미하다.
교통사고로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신 후 같이 살게 된 고모와 여러 가지로 불편해 독립하겠다는 각오만 오로지 잊지 않을 뿐이다. 고모는 대기업 임원까지 올랐다 돈과 명예를 잃고 추락한 후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는다.
채윤은 주말에는 경마장에서, 주중에는 학원에서 행정을 보조하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그달 쓸 돈을 그 전달에 버는 프리터족으로 산다.
어느 날 경마장 정규직인 태경이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제안한다. 일은 일주일에 고작 두 번 하거나 업무량이 늘어난다 해도 몇 번 더 짬을 내면 될 정도여서 별로 부담이 없다. 게다가 오랜 시간 매달리는 기존 아르바이트보다 벌이가 낫다. 다만 일하는 것을 절대로 누설하지 말아야 하고 어기면 큰 금액을 변상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찜찜하다.
결국 채윤은 단기간에 고수입을 올려 해외 유학이라도 가겠다는 생각에 제안을 승낙한다.
일은 굴지의 제약사에서 ‘알렉스’라는 얼굴 없는 업무 지시자가 시키는 대로 물건을 전달하면 된다.
채윤은 배달품이 노화를 멈춰 생명 연장을 돕는 임상시험용 신약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소설은 항노화 연구가 인류의 오랜 꿈에 한 걸음 다가가 이제는 엄연한 현실임을 포착한다. 실제로 오늘날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나이 들어 생기는 주름살을 방지하는 화장품 개발 수준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노화는 더 이상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연하고 예방할 수 있는 일종의 질병으로 여기고 다양한 바이오 기술이 개발 중이다.
소설은 이처럼 생체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현대 과학 기술과 등장인물 사이에서 임상시험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연결고리로 해 흥미롭고 색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 위험한 바이오 테크놀로지와 불나방들, 욕망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다
채윤은 가난한 사람부터 부자에게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찾아가 이들의 일그러진 욕망을 접한다.
주로 배달품을 반기는 사람들을 만나지만 오히려 거부하며 물건이 염색체를 조작하는 약이라고 주장하는 노인 한성태도 만난다. 그는 바이오 연구원 출신으로, 프로젝트가 좌초할 위기에서 임상 시험자를 자청하다 약의 부작용으로 노인이 된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한성태와 채윤의 만남은 프로젝트를 은밀히 주도한 대기업의 음모와 이에 숨겨진 진실에 다가가는 계기가 된다. 이 과정에서 채윤은 고모의 과거와 가족의 죽음에 관한 놀라운 비밀과 마주한다.
소설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약자를 이용하는 거대 자본,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소수 기득권층의 탐욕을 그린다. 또 부작용을 경고하는 시험일지라도 불나방처럼 무분별하게 뛰어드는 인간의 습성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등장인물 대부분은 서로 입장과 위치만 다를 뿐 권력, 돈, 명예 등 일그러진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여기에 젊음을 희구하는 인간의 과욕이 엉켜 원심력을 키우면서 사건은 광기 어린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 뒤틀린 욕망 속 인간의 정체성과 삶의 본질을 신선한 얼개로 일깨우는 이야기
소설은 현대인이 인류사에서 이제껏 누구도 살아본 적 없는 긴 수명을 살고 있음에도 더 교묘해진 이기심과 인간의 이성을 교란하는 자본 권력의 폐해를 폭로한다.
특히 인류를 위한 담론이라도 자본과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이 개입되면 사회에 어떤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는지 잘 보여준다.
이정연 작가는 거대 자본 권력이 인간 생명의 가치보다 이윤 또는 소수 기득권층을 위해 젊음을 갈망하는 대중의 욕구를 이용할 수도 있다는 발상에서 소설을 썼다고 말한다.
이 작가는 사람들이 생명 연장과 젊음을 위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상황에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를 이야기를 통해 정확히 짚는다.
소설은 불로장생의 고전에 나오는 진시황의 집착을 초월한 듯한 욕망의 아바타들이 꾸미는 모략을 현대적인 이야기 얼개 속에 생동감 있게 그린다. 진실을 향해 파고드는 사건 전개는 영화 같은 박진감을 선사한다.
소설에서 임상시험용 신약은 표면적으로 인간의 꿈과 과학 기술의 집약체로 사건의 중심에 자리한다. 하지만 이 작가는 실타래처럼 얽힌 여러 가지 사건들이 사실은 신약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인간의 뒤틀린 욕망에서 비롯된 점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소설은 자본과 기술의 논리 아래 생명의 개념이 누구에게나 공평한지 묻는다. 또 생명과 행복 사이의 함수관계를 밀도 있게 파헤치며 인간으로서 가치 있게 사는 삶이 과연 무엇인지 인간의 정체성과 삶의 본질을 일깨운다.
도입부터 등장해 몰입감을 주는 경마장과 경주마 도핑 검사에 대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도 눈길을 끈다. 도핑 검사소 일상을 디테일하게 표현하고 주인공이 경마장 아르바이트 직원으로 등장한 것은 이 작가가 한국마사회에서 10년 이상 일한 경험 덕분이다.
소설을 제10회 수림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한 심사위원단은 “추리소설의 외양 아래 사회비판적 면모를 적절하게 숨긴 작품”이라며 “시의성과 독특한 설정, 디테일의 구체성 등 신인답지 않은 기량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 수림문학상
수림문학상은 연합뉴스와 수림문화재단이 한국 소설 문학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차세대 작가 발굴을 위해 2013년 공동 제정한 문학상이다. 올해로 10회째를 맞았다.
제1회 수림문학상은 최홍훈의 `훌리건 K`, 제2회는 장강명의 `열광금지, 에바로드`에 돌아갔다. 제3회에서는 수준에 이른 응모작이 없어 수상작을 내지 못했다.
제4회에는 김혜나 작가의 `나의 골드스타 전화기`, 제5회에는 이진 작가의 `기타 부기 셔플`, 제6회에는 김의경 작가의 ‘콜센터’, 제7회에는 최영 작가의 ‘로메리고 주식회사’, 제8회에는 김범정 작가의 ‘버드 캐칭’, 지난해에는 지영 작가의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