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 지영 장편소설
〈심사평〉
코로나19가 지속되고 있고, 인간의 단절은 더욱 심각하게 진행된다. 혹자는 대부분의 활동이 비대면으로 이어지는 이런 현상은 앞당긴 미래의 모습이라고도 한다.
이 시기 인간의 다양한 삶의 모습, 거기서 파생되는 다양한 관계를 이야기하는 소설이야말로 그 역할이 커졌다고 볼 수 있겠다. 원고지 800매 이상의 장편소설 쓰기의 지난한 노력을 잘 알기에 심사는 그 어느 심사보다 많은 공력이 들어갔다. 놀라운 신인의 탄생을 바라는 마음이 공력을 더했을 것이다.
많은 응모작들이 각기 개성을 드러내며 이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어 반가웠다. 한 가지,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의 영상을 잠깐만 봐도, 혹은 대사 처리의 방식만 봐도 잘 만들어진 작품인지 아닌지 안다.
마찬가지로 소설에도 명백한 소설의 문장이 있다. 장편소설은 세계를 다양한 방법으로 확장해 보여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때 이 확장의 방법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좋은 소설인지 아닌지는 ‘어떻게’에서 판가름 나는 경우가 많다. 이 ‘어떻게’가 소설의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소설쓰기는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에 맞춰져 있는데 아직도 무작정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써 나가는 ‘무엇을’에 방점이 찍힌 소설들이 많았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모든 심사위원이 공히 추천한 작품이었다. 테러 현장에서 사고를 당한 뒤 깨어난 인물들이 모국어를 잃고 언젠가 접해 본 적이 있는 언어를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말하게 된다는 설정이 관심을 끌었다. 사고 뒤 전혀 다른 환경에 놓인다는 설정은 낯설지 않지만 그것이 ‘말’이라는 점이 신선했고, 언어와 세계와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힘이 있었다.
모국어를 잃고 전혀 다른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는 것은 몸에 다른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몸 자체가 바뀐 것과 같아, 결국 이 세계에서 고립되고, 먼지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내용은 언어에 대한 놀라운 천착이었다.
또한, 1000매 가까이 되는 작품 전체를 ‘수키 증후군’과 관련된 인터뷰와 기사만으로 채운 점도 놀라웠다. 인터뷰와 기사 사이에는 어떻게 기사를 접하게 됐는지, 혹은 인터뷰를 하게 됐는지 보조 설명도 없이 툭툭 문단이 나뉘고 서술되지만 그것이 허술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의 행이나 연처럼 압축된 힘을 가졌다. 우리의 말을 붙든 낯선 소재, 과감한 생략과 단단한 문장은 다른 소설과 확실한 차별을 보이며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다만, 신체가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는 설정을 할 수밖에 없는 점은 이해가 가지만 설득력이 조금 약했고, 기본 서사가 기사나 인터뷰만으로 채워지고, 행간의 생략이 심하다 보니 일반 독자의 가독력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일부 있었다.
그럼에도 심사위원들은 독특한 설정과 전개 방식으로 새로운 한 세계를 펼쳐 보인 신인의 패기를 높이 샀다. 이 신인은 우리에게 흔히 말하는 소설의 재미를 이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저 그렇게 잘 쓴 소설이 아닌, 전혀 다른 소설의 문법으로 한국문단에 새로운 파장을 일으키길 기대한다.
* 수림문학상
수림문학상은 연합뉴스와 수림문화재단이 한국문학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신진 작가 발굴을 위해 2013년 공동 제정한 문학상이다. 올해 9회째이다. 제1회 수림문학상은 최홍훈의 `훌리건 K`, 제2회는 장강명의 `열광금지, 에바로드`에 돌아갔다. 제3회에서는 수준에 이른 응모작이 없어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제4회에는 김혜나 작가의 `나의 골드스타 전화기`, 제5해에는 이진 작가의 `기타 부기 셔플`, 제6회에는 김의경 작가의 ‘콜센터’, 제7회 최영 작가의 ‘로메리고 주식회사’, 지난해에는 김범정 작가의 ‘버드캐칭’이 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