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신료 전쟁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싼 회사는 어디일까?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바로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다.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전 세계 곳곳에 기지를 두고 수백만 명을 고용한 방대한 조직이었는데 전성기의 시가총액을 현재 화폐 가치로 따지면 무려 8조 3000억 달러에 달한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를 합치면 6조 4000억 달러(2024년 8월 기준)이니 얼마나 대단한 규모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1800년에 돌연 파산을 선언하고 해체되었다. 200년 가까이 존속했던 이 막강한 기업이 무너진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그중 하나는 영국 동인도회사와의 향신료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요리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중세 유럽에서 정향, 육두구, 후추, 시나몬 같은 향신료는 매우 진귀한 기호품이었다. 그래서 향신료 무역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였다. 후추 한 알이 진주 한 알보다 비쌌기 때문에 투자자들에게 수십, 수백 배의 수익을 안겨 줬다. 특히 인기가 높았던 정향과 육두구는 오직 인도네시아반도에 위치한 말루쿠제도(일명 스파이스제도)에서만 생산되었다. 그래서 이 교역로를 확보하고 나아가 이 지역 자체를 차지하는 자가 막대한 부와 해상 패권을 손아귀에 쥘 수 있었다. 향신료 전쟁이란 말루쿠제도를 두고 벌인 유럽 열강들의 치열한 각축전을 말한다. 신간 《향신료 전쟁》은 향신료를 둘러싼 문화, 경제, 사회, 정치, 전쟁, 모험의 역사를 드라마틱하게 구성해 낸 역사 교양서다.
이 책의 저자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8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사업과 여행을 했다. 그중에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에리트레아, 인도 등 주요 향신료 산지이자 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에서 근무할 때 그곳의 역사와 문화를 몸소 체험하고 향신료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향신료에 대해 큰 호기심을 갖게 된 저자는 기꺼이 향신료의 역사를 공부하는 독립 연구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외국 서적과 인터넷 정보를 뒤져 가며 향신료 무역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향신료가 우리의 입맛뿐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까지 바꾸어 놓았음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향신료 교역로를 개척하기 위한 탐험가들의 항해는 최초의 세계 일주, 아메리카 대륙 발견, 북방 항로 개척 등으로 이어져 세계화의 초석이 되었다. 또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탄생한 동인도회사는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유럽의 동인도회사들은 아시아 일대를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으면서 본격적인 제국주의의 시작을 알렸다. 이처럼 향신료를 향한 인간의 염원과 탐욕은 수많은 모험과 신화를 낳았고 때로 무역과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향신료 전쟁》은 스파이스제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유럽 열강의 처절한 아귀다툼과 그로 인해 삶의 터전과 목숨을 빼앗기고 착취당한 섬 주민들의 이야기를 박진감 넘치고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다. 더불어 향신료 도둑 푸아브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직원이었던 《하멜 표류기》의 주인공 하멜, 셰익스피어 작품에 등장하는 향신료 상인 랠프 피치, 시나몬과 카시아의 차이, 세계 3대 향인 용연향·사향·침향의 특징 등 알아 두면 유익한 정보들이 가득하다. 덕분에 성인과 청소년 독자 모두 마치 한 편의 대하 역사 드라마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재미와 감동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세계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