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유럽 - 도시와 공간, 그리고 사람을 만나는 여행
도시의 품격과 공간의 수명은 무엇이 결정할까?
유럽 여행을 하는 목적은 저마다 다르다. 정답은 있을 수 없다. 식도락, 예술 작품 감상, 건축물 답사……. 각자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다양한 여행 코드가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각 도시가 낳은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어떨까. 도시의 품격과 공간의 수명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의 지적생활과 문화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인물들과 교감하는 여행은 발효음식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깊은 맛을 우려낸다.
저자는 지난 15년 동안 ‘천재’라는 코드로 유럽과 북미, 그리고 아시아를 돌아다니며 숱한 이야기들을 수확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인류 문화사에 선명한 발자국을 남긴 인물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파리, 빈, 런던, 프라하, 베를린, 라이프치히 등 유럽 6개 도시를 선별해, 각 도시를 배경으로 다룬 대표적인 영화 이야기로 시작해 지적인 개인주의 여행을 풀어나간다.
이 책은 지적 희열을 추구하는 개인주의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다. 진지하면서도 역사책처럼 결코 무겁지 않고, 참새의 발걸음처럼 경쾌하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그런 유럽 여행을 위한 책이다.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는 파리
벨 에포크와 황금시대에 세계의 작가와 예술가들은 파리로 모여들었다. 덕분에 파리 곳곳에서 그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평생 꽃길을 걸었던 사람의 이야기보다는 성공을 위해 좌충우돌하며 방황했던 이의 이야기에 더 끌리기 마련이다.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인생을 보낸 예술가.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무작정 파리로 왔고, 살아생전 가난에 찌들다가 죽고 나서야 유명해졌다. 우선 몽마르트르에 남겨진 그의 흔적을 따라가 보자. 몽마르트르는 파리에서 반나절밖에 시간이 없는 단체 여행객들도 반드시 가보는 명소. 그중 테르트르 광장은 술만 들어가면 순식간에 술주정뱅이가 되곤 했던 그가 툭하면 난동을 부린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광장 인근 ‘라팽 아질’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민첩한 토끼’라는 뜻의 라팽 아질은 테이블이 10개에 불과한 소박한 술집으로, 지금도 문을 연 1910년 모습 그대로 영업 중이다.
이제 몽파르나스 대로로 가보자. 몽마르나스 대로는 생제르맹 대로처럼 파리 카페의 향기를 맡고 음미할 수 있는 곳. 모딜리아니를 사랑하는 이라면 다른 곳 제쳐놓고 반드시 가봐야 한다. 몽마르트르에서 방황하던 모딜리아니는 피카소의 조언을 듣고 몽파르나스로 무대를 옮긴다. 이곳에는 그의 화실이 있던 그랑 쇼미에르 8번지도 있고, 단골로 드나들던 카페 ‘로통드’도 있다. 특히 로통드는 모딜리아니 성지 순례의 출발역이면서 종착역이다. 카페 벽면이 온통 모딜리아니의 그림이다. 테라코타빛이 진동해 잠자는 관능을 흔든다.
모딜리아니가 짧은 인생을 마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곳으로 가본다. 페르라셰즈 묘지는 묘지 투어가 일상인 파리에서도 가장 격조 있는 공원묘지. 모딜리아니가 잠든 96구역(묘지 번호 70번)은 길에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어 찾기 힘들지만, 사람들이 서 있거나 조화가 많은 곳을 찾으면 틀림없다. 붓을 비롯한 여러 가지 화구(畵具)가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화가를 생각해 맥주 병뚜껑을 올려놓는 사람도 있다. 묘비석 역시 가장 값싼 시멘트 석관이다. 석관에는 사실혼 관계에 있던 잔 에뷔테른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저자는 파리 여행을 크게 네 가지 주제로 제안한다. 예술가들의 성지 몽마르트르, 파리 지성이 꽃핀 카페, 센강의 다리들, 그리고 묘지 투어. 각각의 장소마다 피카소, 보부아르, 사르트르, 스탕달, 발자크, 드가, 니진스키, 보들레르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작가와 예술가들의 흥미진진한 인생 이야기가 펼쳐진다.
신문사 특파원으로 파리에 온 헤밍웨이가 사표를 내고 작가의 꿈을 키우면서 자주 드나들었던 카페 되 마고와 셀렉트, 클로즈리 데 릴라도 소개된다. 특히 클로즈리 데 릴라는 헤밍웨이가 작가로서 명성을 얻기 전 자주 이용한 공간이었다. 헤밍웨이는 아침 일찍 숙소에서 노트를 들고나와 이 카페 야외 테라스 한쪽 모퉁이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미친 듯 글을 썼다. 그는 글을 쓰는 자신을 가리켜 “눈먼 돼지 같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1926년 발표한 그의 데뷔작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는 이곳 테라스에서 6주 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프라하=카프카
중세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프라하. 저자는 그중에서도 구시가광장은 지구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공간이라고 단언한다. 손바닥만한 공간에 기막힌 이야기들이 숨어 있고, 개성 있고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모여 있으며, 무엇보다 수많은 인물들이 거쳐간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곳은 카프카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카프카는 이곳에서 태어나(마이슬로바 2번지) 학교(독일어소년학교와 왕립 김나지움)를 다녔고, 직장(산업재해보험공단)에 다니면서 문학 살롱을 드나들었다. 대표작 중 하나인 『성(城)』을 쓴 곳도 오펠트 하우스였다. 그의 41년 생애가 생가에서 반경 1킬로미터 이내에서 이뤄졌으며, 그 중심은 구시가광장이었다는 이야기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프라하성으로 들어가 본다. 아기자기한 황금골목길은 체코가 자유화된 1990년 이후, 이곳에서 글을 쓴 시인과 작가들 덕분에 유명세를 탔다.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은 하늘색 외벽의 22번지. 프란츠 카프카의 집필실이다. 카프카는 회사에서 퇴근하면 이곳으로 와서 자정까지 글을 썼고, 『시골 의사』, 『회랑 관람석에서』,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같은 여러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밖에 우리는 프라하에서 따뜻한 환대를 받았던 모차르트와 스메타나,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얀 후스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을 키운 런던, 파우스트의 고향 라이프치히…
빈은 카페의 도시다. 카페 문화를 창조한 도시다. 저자는 19~20세기를 빈에서 보낸 인물 중 회화와 정신사의 대표 인물인 클림트와 프로이트가 사랑한 카페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베토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이 까다로운 천재를 알아봤던 파스콸라티 남작을 소개한다. 베토벤은 빈에서 35년간 살면서 무려 30번이나 이사를 했다. 집주인과 궁합이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몰입과 집중이 생명인 천재에게 어쩌면 집주인과의 마찰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스콸라티 남작은 달랐다. 그는 천재를 알아봤고, 베토벤을 위해 무작정 집을 비워놓고 기다렸다. 베토벤은 그의 집에서 모두 세 번을 살았다.
런던은 조지 오웰이 꿈을 키우고 이룬 곳이다. 5년 간의 경찰 생활을 그만두고 무작정 런던으로 온 그가 처음 세 들어 살던 노팅 힐의 집, 부랑자 아닌 부랑자가 되어 진짜 부랑자들과 함께 아침마다 들어가 세수를 하고 발을 닦었던 트래펄가 분수대, 그리고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로 작가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무렵 점원으로 일하며 숙식을 해결했던 고서점 등이 지금도 그 자리에서 눈밝은 여행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라이프치히는 바흐가 27년을 성실하게 복무한 성 토마스 교회로 유명하다. 또한 파우스트의 고향이기도 하다. 라이프치히대학에 다니던 청년 괴테는 식당 아우어바흐 켈러를 드나들며 전설적인 실존 인물 파우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말년에 완성한 필생의 대작 『파우스트』에서 이 식당을 살짝 등장시킨다. 대문호가 식당에 불멸의 미슐랭 이증 마크를 붙여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