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망현 - 의사와 기자 두 개의 눈으로 바라본 김철중의 메디컬 소시올로지
72가지 이야기로 풀어본,
대한민국 의료와 건강의 현주소
대한민국 병원은 국민의 적인가, 의사들은 국민의 종인가
병원과 의사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현대 의학의 한계를 비판하는 글과 책들이 넘쳐 난다. 그만큼 서운한 환자들이 많다는 반증이다. 또한 바꿔 말하면 경영난에 내몰려있는 병원과 의사들의 수난 시대다. 세계적으로도 의료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이지만, 환자들은 늘 서운하고 의사들은 억울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의사로 10년, 기자로 14년을 뜨겁게 보낸 이 책의 저자는 의사와 환자의 시각,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입장으로 대한민국 의료와 사회에 관한 보고서를 써내려간다. 그리고 환자와 의사, 병원에 대한 따뜻하면서도 가슴 뭉클한 72가지 이야기들을 입담 좋게 풀어내면서, 질병 생산 사회 그 자체의 치유를 위한 메시지를 던진다.
환자들은 왜 늘 서운하고 의사들은 억울한 걸까
세계 유래 없는 저렴한 의료혜택을 받고 있으면서도 대한민국 환자들은 왜 늘 서운한 걸까. 환자라는 말만 들어도 아픈 것처럼, 아프면 서러운 게 당연하다. 아픈 것도 서러우니, 작은 것 하나에도 서운해지기 일쑤인 환자. 그리고 우리 모두 그런 환자였거나 환자이고, 환자로 죽을 것이다.
“누구나 환자가 되어 죽는다. 건강했던 사람도 병을 앓았던 사람도 죽는 그 순간에는 모두 환자가 된다. 대한민국 사람 99% 이상은 잉태되는 순간 산부인과 환자로 시작해, 태어나자마자 소아과 환자로 인생을 출발한다. 영안실 장례문화가 보편화한 요즘에는 죽는 순간에도 환자가 되어 이승을 마감한다. 누구나 질병 앞에서는 초라해진다. 질병은 자기 몸의 주인인 내가 내 몸에 너무나 미약한 존재라는 무력감을 준다. 평소에 의사들이 거들먹거린다며 비난하다가도 환자가 되면 그간의 허세는 금세 사라진다. 병원은 능동적 인간을 수동적 인간으로 끌어내리는 신병 훈련소이다.”
“경제성과 효율성이 강조된 현대 의료에서 의학은 지금껏 의료 행위 공급자의 것이었다. 과거 병원이 환자의 영혼과 신체의 상처를 인도주의 손길로 아물게 했던 곳이라면, 이제 의료는 환자라는 의료 소비자를 상대하는 의료 비즈니스로 바뀌었다. 증상에 따라 거부할 수 없는 검사가 쏟아지고, 진단에 따라 선택을 강요받는 치료법이 우르르 나온다. 역설적으로 병원과 의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독점적 위치를 확보한 기업과 기업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독점적 위치를 확보한 병원,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엘리트 집단으로 인정받는(평균 5개 고등학교에서 1명 정도 의대로 진학을 한다) 우수한 인력 집단인 의사들은 또 왜 그리 억울한 걸까.
“병원을 중심으로 발전한 현대의학은 너무나 분화되고 전문화됐다. 내과는 외과를 모르고, 소아과는 산부인과를 모른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병원의 시스템에서 환자는 나이와 질병의 위치에 따라 나뉘는 의료 작업의 대상이 됐다. 주체적 인간이 환자 등록 번호를 부여받으면서 치료 객체로 전락한다.”
“이제 ‘똑똑한 환자’의 등장으로 상황은 달라졌다. 환자들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의료 소비의 주체로 변하고 있다. 병원과 의료인, 정부(보험자)가 긴장해야 할 이유다. 일반 영역의 환자와 전문 영역인 의료의 관계가 일방적이고 종속적이었던 ‘헬스(health) 1.0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 소통하고 보완하고 협력하는 ‘헬스 2.0 시대’로 급속히 옮겨가고 있다.
환자만 객체로 전락하는 게 아니다. 시스템 안에서 의사와 환자도 모두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다. 제대로 된 치료법을 시도해 보고 싶어도 의사 개인이 그 책임을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것이 현실이다. 사회가 병을 키우듯 병을 고치는 것 역시 사회의 몫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끊임없이 질병으로부터 고통받는 인간의 나약함, 그것을 인본주의 차원에서 위로받고 싶은 환자들. 하지만 최고의 진단과 치료를 향해 거침없이 발전해온 현대의학의 기능주의. 이 둘의 끊임없는 엇박자가 우리 삶의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환자는 서운하고, 의사는 억울하다.”
사람은 사회를 만들고, 사회는 질병을 키운다
“많은 질병이 사회 구조와 삶의 파생물이다. 아프도록 해놨기에, 아플 짓을 했기에, 우리는 아프다. 한국처럼 사회 변화가 빠르면, 그 속의 몸도 지치고, 정신도 어지럽다. 삶과 사회의 부조리, 부조화, 부적절이 질병이라는 형태로 우리 몸에 흔적을 남기고 생채기를 낸다.”
“우리는 환자의 손을 잡고 기도하는 따뜻한 의사와 환자를 야단치는 능력 의사를 놓고 선택의 고민을 한다. 친절한 설명에 목말라 하면서도 한편으론 권위를 좇는다. 3분 진료에 분노하면서도 한적한 병원에는 발걸음을 두지 않는다. 고액의 진료비를 비난하면서도 최첨단 의료장비로 무장한 대형병원에서 방황한다. 종합검진 선물 세트는 비쌀수록 잘 팔리면서도, 병실료가 낮은 시장통 같은 5인실에 서로 들어가려고 하는 게 우리의 의료 현실이다.”
내시경으로 들여다보고, 망원경으로 내다보고, 현미경으로 살펴본
72가지 이야기들
환자와 의사, 병원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과 모순의 현장을 저자는 의사 출신 기자로서 가능한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의사였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 기자로 뛰어다녔기 때문에 느꼈던 것들을 너무 딱딱하거나 무겁지 않게, 품격 있는 유머를 곁들여 풀어냈다.
무엇보다 환자가 아니라서 의사가 놓치고 있는 것들, 그리고 의사가 아니라서 환자가 모르는 것들, 또한 병원이라는 시스템에 갇힌 그들을 제도적 차원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들에 대해 명쾌하고도 쉽게 짚어낸다. 그러한 예리하고도 통렬한 안목은 의사 출신의 기자이기 때문에 절로 생겨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야기 전체를 감싸고 있는 환자와 의사, 이 사회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그의 깊은 휴머니스트로서의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본다.
이 책은 한국 의료 안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시시콜콜 건강 정보 가이드북도 아니다. 물론 병원과 의사들의 비리를 속속들이 파헤친 ‘해부학’ 서적은 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일상과 사회에서 우리가 건강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생각하게 만든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에 빠져 책장을 넘기다 보면 비단 환자와 의사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고, 깊은 여운을 남긴다.
결국 이 책은 환자냐 의사냐, 누가 옳고 누구의 탓인지 따지지 않는다. 환자든 의사든 아픈 환자로 죽어갈 운명이기에 우리 모두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위한 치유 메시지를 조근조근 건넨다. 동시에 사회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거울이 되어준다. 값싼 힐링 서적이 판치고, 의료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이 ‘전문가인양’ 의료를 논하고, 사회를 알지도 못하는 의사들이 사회에 훈수를 두는 혼돈의 시대를 향해 아주 오래 내공을 닦은 저자의 따뜻하고도 통렬한 일침이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