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 가장 절실하지만 한 번도 배우지 못했던 일의 경제학
■ 책 소개
우리 시대에 일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내 삶을 움직이는 우리 사회의 작동 원리
가장 절실하지만 한 번도 배우지 못했던 일의 경제학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은 택배 기사, 학원 강사, 대학 교수처럼 흔히 볼 수 있는 현실 속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노동력 재생산, 합리적 인간, 노동과 여가, 효용과 비효용 같은 경제학의 개념을 접목함으로써 바로 ‘나’의 노동이 어떻게 규정되고 선택되고 변화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에 더해 경제학 교과서를 비롯한 대중교육이 가진 환상과도 같은 비현실성과 편향성을 지적하며 실제로 한국 사회가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지를 드러내어 보여준다.
경제학 교과서 같은 세상은 불가능하다
경제학에는 왜 주어가 없나?
과학을 닮으려 노력했던 경제학은 세상을 실증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택한다. ‘세상은 이래야 한다’가 아니라 ‘세상은 이렇다’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지 않을 때면 시장조정 과정을 통해 균형이 회복된다’라는 식이다. ‘시장조정’이 왠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인 양 묘사된다. 물리학자가 충돌하는 원자의 고통을 염려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장조정 중에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한다. 이러한 어법은 교과서 밖 현실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리고 노동에 대한 묘사에서 두드러진다. 고용과 해고의 유연화를 뜻하는 ‘노동시장 유연화’, 임금 삭감이나 근무시간 연장을 가리키는 ‘경영 효율성 제고’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자연적 실업, 자발적 실업이라는 경제학 개념 또한 실직자, 구직자의 괴로움은 어디에도 없이 2,3퍼센트의 실업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으로 묘사된다.
완벽한 완전경쟁의 세계, 그 뒷면
미시경제학 같은 교과서에는 노동자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소비자와 생산자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때 말하는 생산자는 노동자가 아니다. 그리고 경제학 교과서에서 말하는 소비자는 항상 머릿속에 전자계산기와 여러 상품들의 가격 목록을 지니고 다니면서 매순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사람이라고 묘사된다. 주어진 한계 아래에서 자기 효용을 극대화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다. 소비자의 효용이 극대화되는 때는 언제인가. 완전경쟁의 상태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완전경쟁은 경쟁 논리가 완벽하게 작동함으로써 소비자에게 최대 이익을 가져다주는 상태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그 소비자는 바로 경제학 교과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노동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소비자가 바로 그 경쟁의 참가자인 것이다. 소비자의 최대 이익은 바꾸어 말하면 그와 거래하는 생산자의 이익이 최소가 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무엇이 빠져 있을까. 저자는 교과서가 노동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침묵은 말해져야 할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문제를 드러내지 않고 덮어버린다. 졸업하면 대부분 노동자가 되어야 할 학생들에게 교과서에서 노동의 권리에 관해, 노동 강도에 관해, 노동과 자본의 대립에 관해, 결국 노동 그 자체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이다.
세밀하게 그려낸 잔혹 동화와도 같은 우리 시대 노동의 풍경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은 노동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선택되고 변화해가고 받아들여지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노동은 어떤 의미인지를 큰 줄기로 삼아 저자 개인의 경험과 경제학적 개념을 엮어 한국 사회 풍경을 ‘일’이라는 렌즈로 바라보고 25개의 글 속에 세밀하게 그려낸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저자는 무엇보다 한국 경제가 점점 더 승자독식을 관철하는 구조로 바뀌어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기업이나 고소득층이 부유해지고 나면 이익이 아래로 흘러 확산된다는 이른바 ‘흘러내림 효과(trickle-down)’ 이론을 내세우지만 현실에서는 이익이 위로 빨아올려지는 효과(trickle-up)가 발생한다. 기업은 금융투자와 같이 포트폴리오 분산의 원리에 따라 위험을 쪼갠다. 그들이 위험을 분산할수록 그 중 하나의 점에 해당하는 영세한 자영업자나 노동자가 가진 선택지란 위험집중뿐이다. 시쳇말로 기업이 자영업자에게 ‘빨대를 꽂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 스스로 자기 착취에 내몰리기도 한다. 조업중단점이라는 생산이론의 개념이 무색하게 밤새 문을 열고 손님 하나라도 더 받으려는 식당 주인, 소득의 많은 부분을 밥값과 통신비, 주거비 같은 노동력 재생산에 써야만 하는 직장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위험의 집중, 노동의 자기 착취가 자영업자나 비정규직만의 문제는 아니다. 교수인 저자는 자신의 경험, 대치동 학원 강사, 청계산 자락 식당 주인 등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 노동의 조건은 특정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경제 자체가 바로 그 방향으로 수렴되어 감을 보여준다.
고용에서 대신 사용으로: 문자메시지 해고의 의미
노동자의 반대쪽에 있는 사람은 자본가다. 그런데 자본가라는 말 대신 사용자라는 말을 쓴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는 사람이라는 의미라면 사용자는 어떤 제품이나 생산요소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노동과 자본이 맺은 관계는 거래로 탈바꿈한다. 노동자의 인격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비싸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사면 그만이다. 문자메시지로 노동자에게 해고를 통고하는 것은 관계에서 거래로 변모한 우리 시대 노동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노동이 관계에서 거래로 변화하는 현상은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현상에서 잘 드러난다. 비정규직에게는 4대 보험이나 여타 부담 없이 그때그때 일한 대가만 지급하면 되는 거래가 성립하는 것이다. 노동에 따르는 노동을 숙련하고 준비하는 데 따르는 부수적인 시간과 비용은 온전히 노동자의 몫으로 남게 된다.
보험 사회에서 복권 사회로: 자영업자들의 목숨을 건 도약
자영업자가 3년 이상 사업을 지속할 확률은 25%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나머지 3/4의 사람들은 문을 닫을 만큼 생존 확률이 매우 낮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창업을 한다. 왜 그럴까? 뾰족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경제학에서는 위험 애호가(risk lover)라는 용어가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안전판이 마련된 상태일 때 위험 애호적인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반대로 실패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게 빤할 때 오히려 위험 애호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영세 자영업자들이 한 번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위험한 선택을 하는 이유도 일자리 기회가 마땅치 않아 밀려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보험의 원리가 사라지고 복권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은 비단 자영업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익은 위로, 위험은 아래로: 유흥주점형 경제 모델
룸살롱이라고 부르는 유흥주점은 업주-웨이터-마담-접대부로 이루어지는 위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고용-피고용 관계가 아니라 개인 간 거래관계라는 외형을 띤다고 한다. 피라미드형 위계를 유지하면서도 각 단계마다 중간 고리에 해당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서로가 서로를 직접 지배하지 않는 방식, 심지어는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조직이 굴러간다. 지입제로 일을 하는 택배 기사, 식품 영업직원, 택시 기사, 발렛파킹 등 많은 형태의 노동이 이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운영된다. 그러므로 위계의 윗자리를 차지한 기업이나 고용주가 최소화한 거래비용과 위험부담은 위계의 아래쪽에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
소비자의 작은 톨레랑스가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자인 동시에 소비자이다. 그리고 소비자로서 자기 편익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저자는 모든 소비자가 자기 개인의 편익만을 추구할 때 결과적으로 저소득-장시간 노동이 강화된다고 말한다. 그러니 죽도록 일해서 겨우 먹고사는 당사자가 바로 나나 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보도록 하자고 권한다. 그 안에서 톨레랑스를 발휘하고, 할 수 있는 한에서 부당함을 ‘안 하는 편을 택해보자고’ 요청한다.
이렇듯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에서 저자가 다양한 노동의 풍경을 담아낸 의도는 명확하다. 저자는 이를 ‘노동자’란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사람, 또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일하는 이들 모두가 결국엔 노동자라는 사실부터 깨닫도록 하는 것, 경제학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는 노동자 사실은 먹고살아보겠다고 오늘도 아등바등 일하는 우리들 대부분임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라고 에필로그에 밝히고 있다. 나 자신이 노동자이면서 멀게만 느껴지고, 공허한 구호로만 느껴졌던 노동, 이 책은 저자의 의도처럼 내 삶에서 노동이 가지는 의미를 확인하는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실마리를 제공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