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제국의 몰락 - 풍요로운 식탁은 어떻게 미래 식량을 위협하는가
‘언제나 제철’인 수많은 과일들!
인간의 욕망이 자연의 질서를 어떻게 무너뜨리는가
오늘날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부모가 먹던 바나나와 다르다. 1960년대 이후 바나나는 수십 가지 품종에서 단 하나로 표준화되었다. 덕분에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나는 병원체에 절멸당할 위기에 놓였다.
식량도 이와 다르지 않다. 현대 과학은 영원한 풍요로움을 보장하는 듯 보였다. 어떤 과일이든 1년 내내 먹을 수 있으며, 가장 튼튼하고 맛 좋은 품종을 개량하고 복제했다. 기업적 식량생산 시스템은 햇빛과 물, 영양소를 식품으로 바꾸는 과정을 완벽에 가깝게 만들었지만 이렇게 만들어낸 작물은 자연의 분노에 너무나 취약해지고 말았다. 자연은 늘 이긴다.
◎ 인간의 욕심으로 길러낸 클론 바나나가 인류의 먹거리를 위협하다
농업이 세계화되면서 인류의 먹거리는 그 다양성이 급격히 줄고 품종은 균일화되었다. 어느 지역이나 똑같은 작물을 재배하고 똑같은 품종을 사람들은 먹는다. 과학자들은 30만 종 이상의 현생 식물을 명명하고 연구했지만, 사람들이 섭취하는 열량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작물은 열두 종에 불과하다. 인류가 이렇게 단순한 식단에 의존하면서 지구의 형태도 단순해졌다.
우리의 입맛은 산업을 좌우했고, 세상을 형성했고, 무엇을 어디에서 재배할지를 결정했다. 우리의 맛봉오리는 작물을 어디서 어떻게 재배하느냐와 무관하게 당이나 지방을 가장 값싸게 제공하는 작물을 선호하도록 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바나나다.
바나나는 신기한 음식이다. 노랗고 달며 껍질은 쉽게 까진다. 맛있고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매력적인 아침 별미다. 하지만 달콤한 바나나 맛 뒤에 흐르는 사연은 복잡한 인류의 역사가 담겨 있다.
1950년대 중앙아메리카는 당시 소비되던 바나나 대부분을 수출했다. 특히 과테말라는 거대 미국 기업 유나이티드프루트사가 운영하는 바나나 농장의 핵심지역이었다. 거대 기업이 바나나 농장을 운영한 방식은 단순했다. 크기와 맛이 똑같은 예측 가능한 작물, 상업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재배하는 것이었다. 꺾꽂이로 번식되는 클론 바나나의 재배 방식은 경제적 관점에서 천재적이었지만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바나나 하나를 죽일 수 있는 어떤 병원체가 바나나 전체를 다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상업적 거대 기업은 이윤 추구에만 힘을 쏟았다.
결국, 1890년 시작된 파나마병은 바나나 농장을 휩쓸기 시작했고, 1950년대에 들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과테말라의 바나나 농장은 점차 황폐화되었고, 주로 먹던 바나나 품종인 그로미셸은 결국 멸종 위기에 처해 우리 식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거대 기업은 그들의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단순하게 대처했다. 또다시 단일 품종인 캐번디시를 똑같은 방식으로 경작해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병균은 진화한다. 파나마병은 이길 수 있던 캐번디시가 새로 진화한 신종 파나마병에는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인류는 아직 캐번디시를 대처할 품종을 개발하지 못했다. 이제 신종 파나마병이 모든 바나나 농장을 삼키고 나면, 우리 식탁에서는 더 이상 바나나를 볼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의 욕심이 낳은 이런 사태가 바나나에만 국한된 것은 결코 아니다.
◎ 자연은 늘 이긴다
작물에 닥친 위험은 우리가 농업을 단순화한 정도에 정비례한다.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작물은 한 지역에서 재배되다가 병충해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는 경로를 걸었다. 하지만 전 세계가 비행기와 배로 빠르게 연결된 지금은 병충해가 작물의 이동 속도를 따라잡고 있다. 일단 병충해에 따라잡히면 작물을 구할 방법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1845년 아일랜드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에 퍼졌던 감자 역병은 아일랜드에서만 1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잃게 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의 감자 의존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높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 역시 우리의 필요에 의해 선택된 결과로, 단위 면적당 식량 생산량을 계속 늘려야 했던 역사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아일랜드에서 그랬듯,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생산성이 가장 높은 작물에 의존도는 커졌다. 북아메리카의 옥수수, 유럽의 밀, 아프리카의 카사바 그리고 아시아의 쌀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호하는 작물은 어떤 경로로 지구상에 퍼져 나갔을까? 여기서도 어김없이 유럽 열강들의 정복시대가 등장한다. 앞 다투어 신대륙을 차지하던 그때, 몇몇의 품종이 환경이나 특정 조건에 따라 정복자들의 손을 통해 유럽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제대로 된 정보조차 없이 재배가 시작된 몇몇의 품종이 지금 우리의 식탁을 지배하게 되었다.
과거에 비해 지금은 과학이 발달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병충해의 원인을 많이 밝혀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감자 역병조차 극복하지 못했다. 지구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물 종이 아직도 많이 존재한다. 인류가 병균 하나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는 데는 몇 년이 걸리지만 병충해는 순식간에 진화해 새로운 모습으로 인류를 위협한다. 자연은 언제나 앞서 간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의존하는 작물인 카사바 역시 병해의 공격을 받았으며, 초콜릿 생태계 역시 안전하지 않다. 우리는 위기 앞에 놓인 품종이 얼마나 되는지조차도 아직 명확히 모른다.
◎ 인류의 식량과 생물 다양성을 지킨 숨은 영웅들
감자역병 연구에 일생을 바친 진 리스타이노, 카사바를 구한 한스 헤렌 등 인류의 위기 뒤에는 늘 연구에 일생을 바치며 해결책을 찾아나간 과학자들이 있었다. 그들 덕에 인류는 아직 풍요로운 식탁을 만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중 우리는 니콜라이 바빌로프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작물의 육종과 종자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수집한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일 품종을 재배하는 데 따른 문제가 병충해로 인한 멸종만 있는 건 아니다. 전 지구적으로 다양성이 사라진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바빌로프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품종을 모으고 재배 방법을 수집했다. 1935년 바빌로프 연구진은 17만 종이 넘는 작물 품종을 수집해 보관했으며, 이후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들은 이 작물 씨앗을 끝까지 지켜내며 목숨을 잃어갔다.
바빌로프의 연구로 중요성이 각인되어 생겨난 종자은행들은 이후 곳곳에서 꾸준히 발전되었다. 우리가 ‘운명의 날 저장고’라 부르는 스발바르국제종자저장고는 어쩌면 인류의 마지막 희망지이며 그 희망지를 만들어낸 케리 파울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역사 속에 숨어서 인류를 구해낸 수많은 과학자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이 없었다면 아마 인류는 지금과 같은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 이제는 우리 손에 달린 농업의 미래, 인류의 미래
우리는 아직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당장 눈앞에서 버려지는 음식이 더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회의론자들은 식량 부족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선진국은 그다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중앙아메리카, 북아프리카, 중동 같은 ‘그들’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감자 기근이 우리에게 가르친 교훈이 있다. 한 지역에서 작물이 사라지면 전 세계가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농업의 미래는 인류의 미래와 직결된다. 그 농업의 미래가 우리들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 작물을 육종하는 사람들이 지원받도록 투표할 수 있는 게 우리다. 또 거대 기업이 만들어놓은 입맛에서 벗어나 현지의 다양한 품종을 구입할 수 있는 것도 우리다. 소규모 농부들의 전통 방법이야말로 지구에서 생존하는 무한한 생태계와 인류를 제대로 연결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더 간단하게 참여할 수도 있다. 식량을 덜 낭비하면 된다. 고기 소비를 줄이고, 버리는 음식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소소하게 참여할 수 있다. 인류가 해충과 병원체와 벌이는 경주는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 《바나나 제국의 몰락》은 저자 롭 던이 오랜 시간에 걸쳐 수많은 자료와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이뤄낸 역작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 자연과의 공존이 인류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