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전라 좌수영의 새 수사 이순신은 도임한 다음 달에 세계 최초의 장갑선인 거북선을 진수한다. 이어서 풍신수길을 비롯한 왜군이 침입해 오고, 부산과 동래 싸움에 이어서 상주와 충주 싸움에서도 조선군은 참담하게 패배한다. 왕은 수만의 군중들의 아우성도 외면한 채 몽진한다. 조선군이 육전에서 연전연패함에 비해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옥포·당포·한산도·안골포·부산 등지에서 연전연승한다.
한산도와 부산 싸움에서의 승리 이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난다. 주요동제독(駐遼東提督) 이여송(李如松)이 명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다. 어렵게 평양을 회복하고, 전라순찰사 권율(權慄)과 승장 처영(處英)이 행주에서 승전하면서 육전의 양상도 변화한다.
정유년에 왜군이 다시 침입한 후,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체포되나 원로대신 정탁(鄭琢)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백의종군하게 된다. 원균의 칠천도(漆川島) 패전 후 이순신은 다시 충청·전라·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왜군과 싸우다가 노량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저자소개
3·1만세운동의 소식을 상해에서 들었는가 하면, 중일전쟁 발발시에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옥에 갇혔고, 광복 후에는 일제 말엽 훼절로 친일파라는 심판을 받고 수난을 당하였다. 6·25 중에는 젊은 시절부터 고생한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생사불명, 거처불명의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는 민족근대사의 수난을 순교자처럼 받았고, 그것을 민감하게 소설·논설문·시가·수필류·기행문 형식으로 표현하였다(그의 원고매수는 8만매로 추량할 정도로 방대함.). 그의 직업은 교육자·언론인·민족운동가 등 다양하였으나 시종일관한 것은 작가이다. 흔히 이광수는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민족주의·인도주의의 작가로 평가를 받는다.
그것은 시대 분위기와 사회적 조건 그리고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 대체로 이광수의 초기 작품들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계몽하기 위하여 자유연애를 고취하고, 조혼의 폐습을 거부하였는가 하면, <무정>에서는 신교육문제를,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을, <흙>에서는 농민계몽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사상을 계몽하였다.
그러나 이광수 연구자들은 그가 당면한 사회적 갈등에 철저히 대응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설교로 힘을 무산시켰다는 부정적 측면도 검토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인 면에서 그의 친일 행위는 변절한 지식인의 대명사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