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전 세계의 다양한 분야의 고전을 만나본다!
『지만지 고전천줄』은 전 세계의 고전 3,600종을 1,000줄 분량으로 발췌, 26개 언어로 된 원 고전을 직역한 원서 맛 그대로의 고전이다. 문학, 인문사회, 예술뿐만 아니라 물질, 과학, 기술, 경제경영 등 총 54개의 학문분야의 고전을 출간한다. 서구에서 출간된 책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동유럽 등 세계 곳곳의 지식을 맛볼 수 있다.
『지만지 고전천줄』의 231번째 책《바람의 마타사부로 은하철도의 밤》. 이 책은 지쿠마서방에서 출판된 ≪교본 미야자와 겐지 전집≫을 원전으로 사용한 것이다. 특히 <바람의 마타사부로>는 포플러사에서 문고판으로 출판한 <바람의 마타사부로>를 통해 수정, 보완한 것이다. [양장본]
저자소개
저자 :
☑ 저자 소개이 책의 저자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는 1896년(메이지 29년) 일본의 동북지방인 이와테 현(岩手縣) 하나마키(花巻)에서 태어나, 모리오카 고등농림학교(盛岡高等農林學校)를 졸업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단가(短歌)를 짓고, 법화경을 읽었다. 1921년에 문필에 의한 대승불교 포교를 결의하고 맹렬히 창작활동에 전념한다. 1922년경부터 시도 쓰기 시작하여 1924년 시집 ≪봄과 수라(春と修羅)≫를 자비 출판하고 계속하여 동화집 ≪주문이 많은 요리점(注文の多い料理店)≫을 간행했다. 1926년 라스지인협회(羅須地人協會)를 설립하여 농촌 향상을 위해 농사 지도, 비료 사용 상담 등으로 분주했으나 피로가 누적되어 쓰러졌다. 1931년 건강을 회복해 동북쇄석공장의 기사로 일했으나 다시 폐결핵이 악화되어 귀향했고, 병상에서 생활하다가 1933년 9월 21일 급성 폐렴으로 37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본의 근대 시인이며 동화작가, 농촌운동가, 법화경의 행자로서 살았다. 그의 인생에서 특기할 만한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법화경과의 관련성을 들 수 있는데, 그의 생애를 통제한 것은 니치렌(日蓮)과 니치렌을 통해 얻어진 법화경의 이념이었다. 법화경에 대한 신앙은 하나마키의 유지이자 정토진종을 믿었던 아버지와의 갈등을 불러왔고, 이는 장남으로 태어나 가계를 상속해야 하는 겐지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는 겐지의 법화경과의 관련성에 관해 처음에는 다나카 지가쿠(田中智學)의 니치렌종 개혁운동을 접했고, 고쿠추카이(國柱會)를 통해서 해석된 니치렌의 사상과 법화경에 끌리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후에는 다나카 지가쿠의 일련주의를 통하는 것을 그만두고, 직접적으로 니치렌을 통해 법화경의 이념을 체현하는 모티브로 옮겨갔고, 제일 나중에는 직접적으로 법화경의 이념을 자신이 소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종교와 과학이 일치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의 일치를 추구한 점은 문학의 영역인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서 자연과학적, 종교적 상상력을 조형한 데에서 발견된다. 그는 고등농림학교 시절 농학과 학생이면서도 자연계의 과학적, 우주적 질서에 남달리 관심을 나타내었고, 그것을 불교의 우주론과 연결시키고자 했으며, 화학·지질학·광물학에서 얻은 지식을 문학적 표현에 이용했다.
글쓰기와 관련하여 그가 “다카치오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법화문학의 창작에 뜻을 둔다”고 한 것은 그의 나이 25세 때인 1921년의 일이었다. 다카치오는 그의 은사인 다나카 지가쿠의 순정일련주의(純正日蓮主義)의 교의에 따라 “겐지가 시가문학을 잘하므로 그 시가문학상에 순수 신앙이 스며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다나카 지가쿠는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 시기의 불교 사상가로서 국가를 매개로 한 불교를 추구했고, 그의 사회적 관심은 신불교도 운동이나 불교사회주의와 일치했다. 그러나 불교사회주의가 국가에 비판적이었던 데 반해 지가쿠는 국가를 제일로 보는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가쿠는 정교일치를 주장함으로써 종국에는 불교가 군국주의 파시즘에 협력하는 종파가 되는 데 결정적인 이론을 제공했다. 앞서 언급한 겐지와 법화경의 관련성에서 겐지가 지가쿠의 불교 사상에서 벗어나 법화경의 이념을 종교와 과학을 토대로 한 새로운 세계와 융합시켜 갔다는 점과, 군국주의 파시즘에 봉사하는 지가쿠류와는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는 점에서 겐지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다고 할 수 있겠다.
다음으로 여동생인 도시코와 관련된 부분이다. 1922년 11월 겐지는 사랑했던 여동생 도시코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도시코의 죽음으로 인한 겐지의 슬픔과 우울은 1924년 출판한 시집 ≪봄과 수라≫의 일련의 만가 시편들에 나타나 있는바, 이 사건은 겐지로 하여금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여동생의 죽음이 준 충격을 극복하면서 1926년 농학교 교사직을 사직하고 라스지인협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농촌 활동에 전념한 것은 그가 말하는 ‘종교적 정념’의 결과였다. 이러한 종교적 정념을 그는 연애 또는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법화경의 이념이며 그가 평생 소원했던 ‘모든 생물의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도시코 사후에 겪은 내면의 이원화된 갈등이 자아를 해탈한, ‘모두’로 표현되는 전체 지향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도 도시코라는 ‘개(個)’에서 ‘전체(全體)’로 자아가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인도의 범아론 사상의 영향도 지대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농촌 활동가로서의 겐지의 면모다. 겐지는 19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