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예찬 : 현대지성 클래식 45 (라틴어 원전 완역본)
한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젖힌
풍자와 해학의 힘
1511년에 출간된 『우신예찬』은 기독교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방대한 지식과 유려한 문체, 유머, 관용 정신을 담아 내놓은 걸작으로 500년이 지나도록 많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풍자문학의 대표작이다. 종교의 영향력과 힘이 최정점에 이른 당시 서유럽 사회에, ‘우신’(愚神, 어리석음의 신)이 등장해 자신의 능력을 자화자찬하며 특권층과 사회지도자들의 온갖 부패와 죄악을 풍자와 해학으로 드러낸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미학적인 차원에서 문예의 부흥을 꾀했다면, 16세기에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사회 개혁과 도덕적 실천을 보다 강조했는데, 그 중심에 에라스무스가 있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과 종교개혁이라는 신앙 운동이 맞물려 돌아가던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기독교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수용해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조화를 꾀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시절, 인문주의의 매력에 빠져 그리스 고전을 섭렵하며 갈고닦은 비판적 지성과 글쓰기 능력이 자산이 되었다. 실제로 『우신예찬』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학·철학·사상 및 성경을 거침없이 넘나들며 기독교 신앙(로마가톨릭)의 여러 폐해와 모순을 참신한 논리와 문학적 표현으로 빈틈없이 비판했다. 이 책은 그가 1516년에 편찬한 그리스어 신약 성경과 함께, 종교개혁의 효시로 인정받는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1517)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토록 신랄하고도
품격 있는 조롱이라니
에라스무스는 영국을 여행하던 중 친구 토머스 모어의 별장에 잠시 머물게 되었는데, 예전에 영국의 인문주의자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며 『우신예찬』의 원고 대부분을 일주일 만에 써내려갔다. 지병인 신장병의 고통을 잊고, 무료한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우신, 즉 ‘어리석은 신’ 모리아는 행복의 섬에서 웃으면서 태어났고, 만취와 무지의 보살핌을 받는 젊음과 부의 딸이다. 우신은 자기만이 ‘신들과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화자찬하며 연설을 시작한다. 우신이 보기에 현자들, 즉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심각하고 진지해 인생의 즐거움을 모르는 불쌍한 자들이다. 체면과 거짓말, 들쑥날쑥한 잣대로 타인에게 고통이나 주고 있다. 반면에 우신은 자아도취, 쾌락, 아부, 망각, 깊은 잠 같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다니며, 이들을 통해 인생에 쾌락의 맛을 더해주는 더없이 고마운 존재다. 저잣거리 필부에서 저명한 학자와 저술가와 법률가, 내로라하는 귀족과 군주, 고매한 수도사와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우신의 신세를 지지 않은 자가 없으니 우신이 큰소리를 칠 만도 하다. 우신과 그의 시종들을 통해 연출되는 인생의 아이러니한 순간들이 유쾌하게, 서글프게, 때로는 뜨끔하게 그려진다.
이 책은 당시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폐습을 날카롭게 꼬집었기에 1559년 금서 목록에 오르기도 했 다. 그만큼 교회와 정치권력에 대한 신랄한 조롱과 속 시원한 풍자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인간 본성과 사회 현실을 꿰뚫는 통찰이 유머와 풍자라는 코드에 담겨 전달되었기에, 많은 사람이 쉽게 그 메시지를 깨달았다. 그의 풍자 정신은 스페인의 세르반테스나 영국의 셰익스피어 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해학에서 풍자로,
풍자에서 역설로
『우신예찬』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 우신은 자신을 최고 신으로 소개하며 그 근거를 든다(1-15장). 그런 후 이성과 정념, 남자와 여자, 술자리, 우정, 결혼에서 자신이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보여주면서 우신 없이는 인간 사회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16-21장). 국가와 영웅을 탄생시키고 모든 제도를 유지시키며 온갖 기예를 탄생시킨 것도 ‘어리석음’이므로, 이야말로 가장 유익한 것임을 설파한다(22-28장). 진정한 분별력과 행복의 근원이자 중심이 우신이며, 반대로 현자는 어떻게 불행의 중심에 있는지 설명한다(29-37장). 그런 다음 어리석음을 광기와 자아도취에도 연결한다(38-46장). 이때 우신이 자신을 합리화하는 해학이 전면에 부각된다.
두 번째 부분에서 우신은 다른 신들과 달리 자신은 온 세상에서 숭배를 받는다면서 도처에 널린 숭배자들을 하나하나 열거한다(47-61장). 여기서는 저자인 에라스무스가 전면에 등장해 나쁜 의미의 어리석음을 비판한다. 선생, 시인, 수사학자, 저술가, 법률가와 변증가, 철학자, 신학자, 수도사, 군주, 궁정 귀족, 주교, 추기경, 교황, 사제 들을 차례대로 불러내어 그 민낯을 낱낱이 드러낸다. 결론은 “즐겁고 부유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현자들을 피하고 짐승 같은 이들과 어울려야 한다”라는 것이다(61장). 세상만사, 돈이 있어야 돌아가는데 현자들은 돈을 멸시하니 그들을 피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한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풍자에서 역설로 나아가는데, 여기서도 에라스무스가 전면에 등장해 이번에는 여러 유명한 저술가들과 성경을 중심으로 좋은 의미의 어리석음을 제시한다. “기독교인들의 행복은 광기와 어리석음”에 있고 “그들이 받을 최고의 상은 광기”라고 하는 데서 그의 주장은 절정에 이른다. 이렇듯 『우신예찬』은 해학에서 풍자로, 풍자에서 역설로 진행하면서 ‘어리석음’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모두 드러낸다.
르네상스 시대를 상징하는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대표 저작
현대지성 클래식이 45번째로 출간한 『우신예찬』은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하며, 성실하고 유려한 번역으로 호평을 받아온 박문재 번역가가 라틴어 원서에서 직접 옮겼다. 또한, 에라스무스가 본문 곳곳에 사용한 그리스어 표현도 별도로 표시하여 읽는 맛을 살렸다. 413개의 각주와 친절한 해제를 통해 『우신예찬』 집필 당시의 사회·종교 및 문화 배경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도우며,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책을 펴들었어도 한달음에 읽힐 수 있도록 세심하게 문장을 다듬었다. 한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젖힌 풍자와 해학의 막강한 힘을 이 한 권의 책에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