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훙장 평전 - 중국 근대 대사상가 량치차오, 동시대 실권자 리훙장을 말하다
“역사를 쓰는 사람은 반드시 공정한 마음을 가지고 써야 한다!”
자신의 정적마저도 끌어안고 공정한 마음으로 써내려간
중국 근대 대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의 리훙장(李鴻章)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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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의 난과 염군의 난을 진압한 군사가,
대학사, 북양대신, 총리아문대신 등을 역임한 한족계 정치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을 근대화하려 했으나 실패한 양무운동의 선구자,
기울어가는 청나라의 대표로서 외국 열강들을 상대로 굴욕적인 조약들을 체결한 외교가,
리훙장의 삶은 격동의 19세기 근대 중국 역사 그 자체다!
중국 근대 대사상가 량치차오의 눈으로 바라본
격동의 19세기 중국 근대사와 그 역사를 관통한 리훙장의 삶!
리훙장(李鴻章)은 19세기 중국 근대사에서 군사가, 정치가, 외교가로서 40여 년이나 실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과 염군(捻軍)의 난을 진압해 명성을 얻은 군사가, 그것을 바탕으로 만주족 관원 일색인 중앙 정계에 진출해 대학사, 북양대신, 총리아문대신 등 요직을 차지한 몇 안 되는 한족계 정치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을 근대화하려 했으나 실패한 양무운동의 선구자, 기울어가는 청나라를 대표해 외국 열강들을 상대로 굴욕적인 마관조약(시모노세키조약), 중러밀약, 중러만주조약, 신축조약 등을 체결해야 했던 외교가였다. 19세기 중국 근대사의 거의 모든 일이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할 정도로 리훙장은 19세기 중국 근대사와 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리훙장의 삶은 격동의 19세기 중국 근대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리훙장은 한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리훙장은 19세기 후반 청나라 대신(大臣)으로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고 대조선 정책을 주도한 인물로, 처음에는 소극적인 불간섭정책을 펴나가다가 임오군란 수습 과정부터 실질적인 간섭정책으로 전환했고, 이후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파견하여 조선 정부의 내정 및 외교에 적극적으로 간섭했다. 일본과 톈진조약을 맺고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에 개입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일본과 청일전쟁을 치르고 일본에 패해 그동안 쌓아온 군사적 명성을 하루아침에 잃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책은 구사상을 배격하고 서양의 신사상을 중국에 소개하여 중국 개화에 공헌한 중국 근대 대사상가이자 개혁가, 문학가인 량치차오(梁啓超)가 직접 쓴 리훙장 평전이다. 량치차오는 동시대 실권자이자 자신의 정적(政敵)이기도 한 리훙장이 1901년에 죽자, 같은 해에 이 책을 썼다. 왜 량치차오는 자신의 정적인 리훙장 평전을 썼는가?
리훙장은 과연 ‘동양의 비스마르크’인가, 매국노인가?
19세기 중국 근대사는 리훙장이라는 인물과 관련이 깊기 때문에 19세기 중국 근대사를 제대로 알려면 리훙장이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당시 사람들은 청일전쟁의 패배와 굴욕적인 조약 체결 책임을 모두 리훙장에게 돌리면서 매국노, 한간(漢奸), 부정부패자라고 비난했다. 한편, 1896년 독일을 방문한 리훙장에게 빌헬름 2세는 ‘동양의 비스마르크’라는 수식어를 붙이기까지 했다. 리훙장은 과연 ‘동양의 비스마르크’인가, 매국노인가?
저자 량치차오는 이 책에서 “역사를 쓰는 사람은 반드시 공정한 마음을 가지고 써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기꺼이 자신의 정적마저도 끌어안고 공정한 마음으로 군사가, 정치가, 외교가로서 리훙장의 잘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청일전쟁의 패배와 외국 열강들과의 굴욕적인 조약 체결 책임을 모두 리훙장 한 사람에게만 돌린다면 정권을 잡고 나라를 망친 다른 중신들의 죄까지 리훙장에게 덮어씌우는 꼴이 될 것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리훙장은 중국의 수천 년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19세기 세계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저자 량치차오는 이 책에서 리훙장이 살았던 19세기 청나라의 상황과 그 속에서 리훙장이 처한 위치, 외국 열강들이 몰려들고 반란이 끝없이 이어지는 혼란기에 중국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군사가, 정치가, 외교가로서 리훙장의 삶을 돌아보고, 리훙장이 “시대가 만든 영웅일 뿐, 시대를 만든 영웅은 아니었다”고 평하면서 리훙장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연민, 리훙장 사후 더 이상 인재가 없는 중국의 현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특히 유럽 순방 중 비스마르크를 만난 리훙장이 만주족 관원 일색인 청조에서 한족 중신으로서 자신이 느끼는 고뇌와 근심, 분노와 우려를 털어놓으며 조언을 구한 일화를 비롯해서 당시 벌어진 역사적 사건에 대한 량치차오 개인의 솔직한 생각을 담은 부연 설명, 그리고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리훙장이 과연 어떤 인물인지 설명하기 위해 중국과 중국 밖의 인물 16인(곽광, 제갈량, 곽자의, 왕안석, 진회, 쩡궈판, 쭤쭝탕, 리슈청, 장즈퉁, 위안스카이, 메테르니히, 비스마르크, 글래드스턴, 티에르, 이이 나오스케, 이토 히로부미)과 리훙장을 각각 비교해 설명하고 있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최근 개혁ㆍ개방을 거쳐 경제 강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은 양무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리훙장을 태평천국의 난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을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애국자이자 민족주의 정치가, 이이제이(以夷制夷)로 열강을 견제하려 했던 외교가로 재평가하고 있다. 이 책은 격동의 19세기 중국 근대사와 그 당시 실권자인 리훙장이라는 인물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길잡이가 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국에 부는 리훙장 재평가의 바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해줄 것이다.
리훙장, 그는 누구인가?
1823년 중국 안후이 성(安徽省) 허페이 현(合肥縣)에서 태어났다. 1844년에 향시(鄕試)에 합격한 후 베이징(北京)으로 올라와 유명한 정치가이자 학자인 쩡궈판(曾?藩)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후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관료로서의 길을 착실하게 가던 리훙장에게 태평천국의 난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1853년 태평군의 기세가 높아지자, 리훙장은 조정의 명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 의용군인 회군(淮軍)을 조직했고, 안후이 순무(安徽巡?) 푸지(福濟) 휘하에서 활약한다. 이후 자신을 인정해준 쩡궈판의 참모로 들어가 쩡궈판의 상군(湘軍) 및 고든의 상승군(常勝軍)과 연합해 태평군 소탕의 주력 인물로 활약하여 결국 1864년에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했다. 그리고 이어서 발생한 염군(捻軍)의 난을 진압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을 발판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리훙장은 스승 쩡궈판과 함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이끌었고, 쩡궈판이 세상을 떠난 뒤 청 정부의 최고 정치가이자 외교가로서 활약했다. 이 양무운동을 바탕으로 리훙장은 북양해군을 창설하여 훈련시켰으나, 1894년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무참하게 패배했다. 전쟁 후 정치 전면에서 물러나게 되나, 외교 면에서는 청 정부를 대신하여 외교 업무를 처리하여 외국 열강들을 상대로 굴욕적인 조약들을 체결하는 당사자가 되었다. 치욕적인 말년을 보낸 리훙장은 청이 맺은 대외조약 중 가장 치욕적인 ‘신축조약(베이징의정서)’을 체결하고 얼마 뒤인 1901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