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복종
5세기 동안 유럽을 배회하던 복종의 관성을 흔들어 깨운 18세 청년의 격문
- 프랑스혁명부터 시몬 베유, 빌헬름 라이히, 질 들뢰즈 등에까지…
세기적 정치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격정적 논설
역사가 시작된 어느 순간부터 민중은 독재자의 발밑에서 조아리며 그저 견뎌내거나, 심지어 그 억압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른다. 라 보에시는 뜨겁게 말한다. 이 불행한 역사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태어날 때부터 내 것이었던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고. 1548년에 작성된 이 짧지만 위험한 격문은 작가의 요절과 그의 소중한 친구인 사상가이자 《수상록》의 저자 몽테뉴의 희망으로 26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1574년. 세상을 뒤흔든 이 문제작은 모나르코마크Monarchomaques라 불리던 절대왕정의 저항세력에 의해 처음 세상의 빛을 보았고, 이후 프랑스혁명과 아나키즘운동, 시민불복종운동에 영감을 제공한다. 프랑스혁명의 주역으로 활약했던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는 라 보에시의 메시지를 언급하면서 “스스로가 움켜쥐고 있던 노예의 사슬을 끊어내자”고 부르짖었다. 같은 시기 혁명가 피에르 베르니오Pierre Vergniaud는 “독재자가 커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의 무릎 아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어선다면, 그는 더 이상 우리 위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역사적인 연설로 라 보에시의 사상을 전하며 민중의 혁명 의지에 불을 지폈다.
20세기의 정치철학자들이 줄기차게 다뤘던 핵심적인 수수께끼는 바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대중’이다. 프랑스 사상가인 시몬 베유Simone Weil나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분석가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거의 모든 사회 구조의 핵심을 이루는 자발적 복종, 이 뒤틀린 민중의 욕망을 해결하고자 애썼다. 그리고 질 들뢰즈는 자발적 복종을 자본주의가 장착해놓은 주요 장애물이라 여기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왜 민중은 자신의 노예 된 삶을 숭배하는가? 어찌하여 인간은 그것이 자유라도 되는 양 굴종을 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가? 어찌하여 민중은 자유를 획득하는 것뿐 아니라, 단지 그것을 견뎌내는 것조차 힘들어하는가?”
《자발적 복종》은 ‘왜 사람들은 복종하는가?’라는 한 청년 법학도의 질문에서 시작되어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은 물론 정치철학의 핵심 사상을 제공한 격정적 논설이다. 라 보에시는 복종의 가장 큰 이유가 ‘습관’이며 자유에 대한 ‘망각’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절대권력이란 존재가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그 오랜 습관이 이어져오면서 종속의 상태를 받아들인 부모 밑에서 자란 후세들은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자유’를 알아보지 못하고 종속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